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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우리말] 인용의 시간

해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은 글쓰기에서 인용할 때 자주 쓰는 표현입니다. 내 생각이 하늘에서 떨어진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말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대로 인용하자고 하면 끝이 없고, 끔찍할 정도로 인용 투성이가 될 겁니다. 도대체 내 고유하고 창의적인 생각은 있기는 한 걸까요?   인용을 이야기할 때마다 저는 예전에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에서 종교학의 석학이신 박성배 선생님께 불교를 배울 때 들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인용하지 않은 부분, 즉 주석을 달지 않은 부분은 자신의 이야기로 확신하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충격적인 말씀이셨습니다. 출처가 분명한 인용에는 주를 달고, 참고문헌으로 표시할 수 있지만, 어디서 들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수많은 이야기는 마치 모두 내 생각인 양 쓰고 있는 겁니다. 생각해 보면 각주 처리를 하는 것 자체가 지적 오만일 수 있습니다. 요즘에는 때로 각주를 달지 않고 두루두루 영향을 받은 글이라고 밝힐 때도 있습니다.     오만이 길을 잘못 들어서면 허영이 됩니다. 많은 참고문헌과 각주는 나의 독서량을 보여주려는 일종의 허영심입니다. 움베르토 에코 역시 글쓰기에서 주석의 문제에 대해 비슷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이 읽었다고, 어려운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는 느낌을 주는 겁니다. 제 마음과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항상 각주를 달 때마다 고민스럽습니다. 오만인지, 허영인지, 아니면 심한 사기인지.   사기성이 드러나는 것은 출처를 밝히지 않는 인용입니다. 우리가 보통 표절이라고 하는 방식입니다. 남의 글을 표시 없이 가져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이 표절입니다. 도적질인 셈입니다. 그뿐 아니라 실제로는 재인용을 한 것임에도 마치 직접 본 글인 양 쓰는 것도 표절입니다. 번역서 또는 남이 해놓은 번역을 보고서는 마치 본인이 원서를 본 것처럼 쓰는 것도 표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표절의 범위가 넓습니다. 앞으로는 인공지능이 대신 써준 글도 표절 혹은 대필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표절과 대필은 범죄입니다.   인용할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좋은 내용을 인용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 선행연구의 착실한 검토가 필요합니다. 물론 평소에 좋은 글귀를 메모하는 게 좋습니다. 메모할 때는 자신의 생각을 담아 비판적으로 살펴보아야 합니다. 학술지에 나온 논문은 검증된 자료라는 점에서 좋은 인용 거리가 됩니다. 대중적인 학술서나 학술 에세이, 칼럼 등도 메모의 소재입니다.   인용할 때 본문 속에 쓰는 내주(內註)는 직접 인용이 간결합니다. 간접 인용할 때는 어디까지가 인용이고, 어디부터가 자신의 생각인지 잘 구별하여야 합니다. 많은 글이 인용과 의견이 불분명합니다. 본문 아래에 쓰는 각주나 본문 뒤에 적는 미주의 경우는 저마다 특징이 있습니다. 금방 참고할 필요가 있는 내용이라면 각주가 낫습니다. 내용이 긴 주석이라면 미주로 돌리는 편이 본문에 대한 집중도를 높입니다.   인용은 자신의 수준을 보여줍니다. 어떤 책과 논문을 읽었는지, 어떤 종류의 칼럼을 읽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인용은 글에 대한 이해의 깊이를 보입니다. 두려운 순간이지요. 그래서 인용의 시간은 성실의 시간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용할 때 자신의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시간 표절과 대필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학 학술 에세이

2023-04-02

[아름다운 우리말] 왜 학술 에세이인가?

우리는 왜 학술 에세이를 읽고, 배우고, 쓸까요? 이 세 가지의 순서는 종종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특히 ‘배우고’는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배우지 않아도 우리는 학술 에세이를 읽고, 쓰기 때문입니다. 학술 에세이를 쓰는 유명인에게 ‘쓰기 방법’을 배운 적이 있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답은 ‘아니다’일 겁니다. 재미있는 추측입니다만, 학술 에세이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사람에게 쓰기 방법을 배운 적이 있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도 ‘아니다’인 경우가 상당수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읽기’와 ‘쓰기’만 학술 에세이에서 남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고민은 남습니다. 왜냐하면 평생토록 쓰기는 해 본 적이 없고, 해 볼 일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학술 에세이를 배울까요? 쓸 일도 없는데 말입니다. 학술 에세이 쓰기와 관해서도 재미있는 추측을 해 보자면 학술 에세이를 가르치는 사람 중에도 학술 에세이를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겁니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써 본 적이 없다고 가르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쓰는 것과 가르치는 것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학생의 주의를 끄는 교수법을 가르치는 강의가 더 졸린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졸린 강의를 들은 사람이 나중에 훨씬 멋지게 강의를 하는 경우도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요? 이렇듯 강의와 실제는 다릅니다. 어쩌면 학술 에세이는 읽기만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학술 에세이 수업은 좋은, 또는 모범적인 학술 에세이를 선별해서 읽게 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학술 에세이라는 주제를 앞에 놓으면 이렇게 고민이 많습니다. 학생들, 또는 독자에게 학술 에세이 쓰기는 도대체 필요할까요?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고 설득할 수 있을까요? 이 고민은 가르치는 사람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원초적으로 교과과정을 개발한 사람들의 고민이 선행되어야 하고, 결론적으로는 배우는 사람도 능동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술 에세이 쓰기는 그저 뜬구름 잡기에 불과합니다.     이 글을 쓰는 저는 학술 에세이 쓰기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저 역시 학술 에세이를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지만, 생활 속에서 학술 에세이와 학술 논문을 쓰는 처지에서 이런 종류의 쓰기 교육은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설명하자면, 학술 에세이를 읽게 하고, 학술 에세이를 쓸 수 있게 하는 것은 삶에서 중요한 일입니다. 물론 학술 에세이가 없어도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학술 에세이가 삶을 풍요롭게 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에세이’는 읽기와 쓰기라는 언어기능에만 관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듣기와 말하기에도 관계합니다. 특히 말하기에 큰 도움을 줍니다. 학술 에세이 쓰기는 달리 표현하면 학술 에세이 말하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말하는 것을 전부 글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보다 학술 에세이를 쓸 기회는 매우 적을지 모르지만, 학술 에세이를 말할 기회는 상상외로 잦을 겁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학술 에세이 비슷한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분야의 전문 지식이나 상대가 잘 모르는 어떤 내용을 쉽고, 재미있고, 논리적으로 설명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대화 상대는 늘 달라집니다. 부모, 형제, 배우자, 자녀 등 가족이 될 수도 있고, 친구나 직장동료, 혹은 제자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대화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에 그 대화는 학술 에세이와 닮아있습니다. 저는 학술 에세이를 배우면서 우선 말해 보기를 권합니다. 생각을 입 밖으로 내고 나면, 특별한 느낌도 만나게 됩니다. 생각과 말은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그 말을 글로 써 보면 더 특별한 느낌이 들게 될 겁니다. 그러고 나면 왜 학술 에세이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학술 에세이는 나를 한 뼘 더 자라나게 합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에세이 학술 학술 에세이 학술 논문 쓰기 방법

2023-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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